아무 이유 없이 지친 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있다. 감정도 생각도 사라지고, 그냥 가만히 숨만 쉬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럴 때 "괜찮아"라는 한마디가 생각보다 멀게 느껴질 수 있다. 이 글은 그런 날의 당신에게 전하는 조용한 위로와, 아주 작은 회복의 시작을 담았다.
무기력은 게으름이 아니다
무기력은 흔히 "의지의 문제", "게으름"으로 오해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내면의 신호다. 정신과 전문의 김지용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이 무기력할 때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뇌에 필요한 호르몬들이 고갈돼 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예요." 실제로 우울이나 번아웃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세로토닌, 도파민 등 감정 조절과 동기를 담당하는 호르몬 수치가 떨어져 있어 일상적인 행동조차도 버겁다. 침대에 누워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는 시간이 반복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문제는 이 상태를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고 자책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무기력하지?”, “다들 잘만 사는데 나는 왜 이럴까?” 이런 생각은 더 깊은 자기 비난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무기력은 '회복이 필요한 상태'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단순한 나태가 아니라, 에너지가 고갈된 몸과 마음이 휴식을 요청하는 신호인 것이다.
감정이 메마를수록, 위로는 더욱 작게 시작되어야 한다
무기력의 가장 무서운 점은 ‘감정이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채 텅 빈 듯 하루를 견디게 된다. 그리고 그 감정은 "툭" 하고 건드려지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식으로 표출된다. 이럴 땐 감정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더 중요하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감정 마비(emotional numbness)’라고 부른다. 정서적으로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경우, 자기 방어 기제로 감정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때 “괜찮아”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해주는 것조차도 어려워진다. 하지만 작은 방법으로, 마음을 다시 조금씩 깨울 수 있다. 예를 들어, 드라마나 영화처럼 몰입할 수 있는 콘텐츠를 보는 것도 효과적인 회복 루틴이다. 김지용 정신과 의사는 말한다. “드라마의 인물들이 힘든 상황을 견디고 나아가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다 보면, 뇌는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감정에 조금씩 반응하게 된다.” 실제로 무기력했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땐 그냥 드라마에 빠져봤다”는 말을 많이 한다. 뭔가에 몰입하는 행위 자체가 감정의 마비를 깨우는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처음으로 해본 말, ‘수고했어’
한 방송에서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하월아, 수고했어”라고 말해보라’는 장면이 있었다. 무심코 따라 했던 이 행동에, 갑작스럽게 눈물이 왈칵 터졌다. 나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수고했어”라고 말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잘도 따뜻한 말을 건네면서, 정작 가장 가까운 ‘나 자신’에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갑게 대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 자비(self-compassion)’라고 한다. 특히 자기 이름을 부르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행위는, 감정 안정과 스트레스 완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도 존재한다. 자신의 이름을 직접 부름으로써, 뇌는 ‘나’라는 존재를 외부의 소중한 사람처럼 인식하고 자기 돌봄의 태도를 더 쉽게 활성화시킨다고 한다. “수고했어, 하월아.” 그 말 한마디가 어느 날의 무기력한 나를 조용히 안아준 순간이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나를 안아줬던 기억은 아직도 마음 한켠에 따뜻하게 남아 있다. 무기력한 감정은 아무 이유 없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럴 땐 억지로 일어서려 하기보다는, 그저 그렇게 누워 있어도 괜찮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것부터가 회복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무기력할 때 나를 다시 살린 5가지 방법
- 하루 한 편, 나를 울린 드라마에 몰입하기
- 거울 앞에서 “(내 이름)아, 수고했어” 말하며 어깨 쓰다듬기
- 밥을 못 먹더라도, 따뜻한 물 한 잔 챙기기
- 누워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만 느끼기
- 감정 없는 날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기
괜찮아,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돼. 괜찮아,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혼자서 외롭고 힘들었지. 무기력은 ‘쉬어야 할 때’라는 신호다.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애쓰고 있고, 오늘도 그렇게 견뎠다는 것만으로도 잘하고 있다. 감정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 조금만 더 천천히, 당신의 속도로 회복해 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