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가 철학 시리즈 | 바가바드 기타: 삶과 고통, 수행의 시작 (1편)
죽고 죽이는 전쟁터 한가운데서 요가를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비와 평화를 말할 법한 요가의 가르침이 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현장에서 시작되는가?
전차에 오른 전사 아르주나(Arjuna)는 눈앞에 선 이들이 스승이자 친구이며 가족이라는 사실 앞에서 무너진다.
그는 활을 내려놓고,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무릎을 꿇는다.
더 이상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된 상태.
그는 감정과 의무 사이에서 갈라지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한 채 멈춰 서 있다.
그 순간, 그의 전차를 모는 마부로 위장한 신 크리슈나(Kṛṣṇa)는 요가의 가르침을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바가바드 기타는 단순한 전쟁 이야기를 넘어선다.
삶의 혼란과 고통, 딜레마 속에서 어떻게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철학적 안내서가 된다.
전장, 삶의 상징
이야기 속 전장은 단지 역사적 전투가 아니다.
우리가 매일 서 있는 현실의 무대, 인간관계, 책임, 선택의 갈림길이 바로 그 전장이다.
아르주나는 단지 겁이 나서 무너진 것이 아니다.
그는 “과연 내가 이 싸움을 해야만 하나?”, “이게 옳은가?”라는 깊은 내면의 갈등에 빠진다.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바로 그 자리에서 크리슈나는 말한다.
오히려 싸움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지금 너는 분노나 탐욕 때문이 아니라, 연민과 고뇌 속에서 무너졌다.
하지만 그 감정에 짓눌려 자신의 의무(svadharma)를 포기하는 것도 또 하나의 집착이라고 말한다.
“행위를 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그것이 요가다.”
“네가 전사로 태어났다면, 전사로서의 길을 걸어라.”
그가 강조하는 것은 단지 ‘싸워라’가 아니라,
“너는 어떤 존재이며,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자각이다.
요가는 폭력이나 도망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깨달아 깨어 있는 상태로 수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한가운데서 의식적으로 싸우는 ‘요가적 행위’이며,
바로 그러한 삶의 태도가 수행 그 자체라고 말한다.
요가, 고통에서 시작되다
많은 사람들은 요가를 평온함의 도구로 이해한다.
그러나 바가바드 기타는 말한다. 요가는 고요한 동굴이 아니라, 갈등과 혼돈의 중심에서 시작된다.
아르주나가 무너진 그 자리는, 우리 모두가 삶에서 한 번쯤 마주하는 지점이다.
의무와 감정이 충돌하고, 옳고 그름이 흐려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은 무력감이 찾아오는 바로 그 자리.
바로 거기서 요가가 시작된다.
이것은 다른 고전 요가 철학과도 일치한다.
《요가수트라》에서는:
योगश् चित्तवृत्तिनिरोधः
yogaś citta-vṛtti-nirodhaḥ
(요가쉬 찟따 브리띠 니로다하)
요가란 마음(의식)의 움직임을 잠재우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의 움직임’은 걱정, 욕망, 집착, 판단, 공포 같은 고통을 만드는 생각의 흐름들이다.
요가는 그 혼란을 외면하거나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을 의식적으로 통과하는 힘이다.
이 장면이 등장하는『마하바라타(Mahābhārata)』는 인도 고대의 대서사시로,
전쟁과 영웅 이야기 속에 인간의 윤리, 철학, 깨달음을 녹여낸 방대한 상징적 서사다.
소설과 같지만 단순한 허구가 아닌, 인간의 실존적 질문들을 신화적 상징으로 풀어낸 고전이다.
의식적으로 행한다는 것
योगः कर्मसु कौशलम्
yogaḥ karmasu kauśalam
(요가하 카르마수 카우샬람)
"요가는 행위에 있어서의 숙련이다." (바가바드 기타 2.50)
이 말은 단순히 ‘일을 잘하라’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숙련’은 내면이 맑고 깨어 있는 상태에서 행위하는 능력을 뜻한다.
즉,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인정받으려는 욕망 없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지금 해야 할 일’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상태.
현실 속에서 말하자면,
누군가는 SNS에 글을 올릴 때 ‘좋아요 수’를 기대하며 불안해하고,
누군가는 단지 지금 전하고 싶은 말을 담담히 남긴다.
요가는 바로 그 두 마음 사이에서 집착 없는 의식의 중심에 서는 것이다.
바로 그런 ‘요가적 상태’에서 싸우라는 것이 크리슈나의 가르침이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싸움을 포기하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싸움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단, 욕망이나 증오가 아니라 깨달은 의식 상태에서 그 싸움을 수행하라고 한다.
회피 아닌 직면으로
때로 사람들은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수행’을 말하곤 한다.
현실이 너무 버거우니, 명상이나 영성에 몰두하면 감정들을 마비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바가바드 기타는 정반대의 태도를 요구한다.
세속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에서 중심을 잡고 깨어 있으라는 요청이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 “왜 싸우는가?”,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가?”를 먼저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던져진다.
✍ 니슈카르마는 묻는다
나는 지금 어떤 전장에 서 있는가?
그 전장에서 나는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싸움을 피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그 두려움은 정말 나의 것인가, 아니면 주어진 역할에 붙어온 감정일 뿐인가?
📖 다음 글:
② 왜 결과를 내려놓고 행동하라고 말할까 – 니슈카마 카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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